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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다자이 오사무 전집』 (도서출판 b, 2012) 만년 - 다자이 오사무 지음, 정수윤 옮김/비(도서출판b) 곤란하다. 이렇게 스스로를 뻔히 보이는 악덕 속에 밀어넣어서는 곤란한 것이다. 하나같이 데카당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데카당이 아니다. 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끄집어내서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이런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하다 보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들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표현하지 않아서 데카당이 아니고, 표현했기 때문에 데카당이다. 자기변호에 서투르기 때문에 데카당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자신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괴로움에 신음하는 거다. 그에게 있어 승부를 양보하는 것은 오만함이 아니라 노력의 결과라고 봐도 좋다. 몹시 답답할 정도로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외려 절실히 생각할 수.. 더보기
『진혼가』 하세 세이슈 (북홀릭, 2012) 진혼가 - 하세 세이슈 지음, 이기웅 옮김/북홀릭(bookholic) 좀 들어 봐, 케이크 하나가 있다 치자고. 내 생일인데도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_뭐, 깜짝 놀래 주려고 연극을 한 거지만. 난 그런 낌새는커녕 하루 종일 뭐 빠지게 일만 죽어라 하다 집에 들어왔어. 불빛은 하나도 없고 숨이 막혀서 가슴이 졸아들지_뭐야 이거, 지금까지 돈 벌어오는 기계로 살아왔는데 이젠 내 인생도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를 눈앞에 들이밀고는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거야_나는 놀라서 말도 못해_너무 기뻐서. 담배 냄새가 찐득거리는 입으로 촛불을 끄고 소원을 빌지_이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게 해주소서. 모두들 케이크를 한 조각씩 먹으며 웃음을 나눠. .. 더보기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을유문화사, 2012)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이혜승 옮김/을유문화사 「창조의 권리만큼 중요한 것이 비평의 권리다.」 이 뒤로는 '이것은 사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줄 수 있는 가장 풍요로운 선물……'이란 말이 붙는다. 지당하고 지당한 말이다. 거기다가 나는 대부분의 쾌감은 사물과 추상의 사후 해석에서 온다고 믿기 때문에 비평의 권리와 자유야말로 인간 감정을 히말라야 산맥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본다. 일단 역사와 달리 문학은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보다는 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해석의 여지가 풍부하다. 이 문학적인 서사로 보건대 문학과 비문학을 구분하는 것 자체도 고역이거니와 대체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문학으로 간주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더보기
『뿔』 조 힐 (비채, 2012) 뿔 -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비채 먼저 패닉의 「뿔」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가 간지러워서 뒤통수 근처를 만져보니 뿔이 하나 돋아났네, 이쯤은 뭐 어때 모자를 쓰면 되지 뭐, 직장의 동료들 한마디씩, 거 모자 한번 어울리네, 어쩐지 요즘엔 사는 게 짜릿짜릿해, 나만이 간직한 비밀이란 이렇게나 즐거워……. 이에 반해 조 힐에게 돋아난 뿔은 위치도 다르거니와 게다가 패닉의 경우처럼 낭만적이지도 않다. 어쩐지, 빌어먹을 『말벌 공장』 같은 책이다. 아, 뭐 그렇다고 정말 '빌어먹을 뭣 같은 책'이란 건 아니고. 그럼 뭐가 문제냐. 종교적 해석? 프로이트 대입? 상징에 또 상징? 맙소사. 이 소설을 읽으려면 정신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거다. 주인공 이그가 태생적으로 트럼펫을 불 수 없게끔 설정된 상.. 더보기
『안주』 미야베 미유키 (북스피어, 2012) 안주 -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편집자 후기에도 '진화'에 대해 적혀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괴담은 분명 『흑백』에서 변했다 ㅡ 그래서 '변조 괴담'이다. 여기서 나는 하나를 더 생각한다. 『흑백』에 이은 이 『안주(暗獸)』에 이르러서 한 번 더 진화(란 표현이 과연 적절할는지는 모르겠다)했다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인 주인공 오치카를 보면 확연히 알게 된다. 전작이 어딘지 모르게 꿈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인상이었다면 이번에는 무대가 되는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에서 더 한 발짝 내딛는다. 바깥이란 현실로. 그러니까 어떤 보이지 않는 필터를 통해 이야기되었던 것이 지금은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언제라도 그것을 열고서 목전에 할 수 있다는 느낌이랄까(꼭 메세나의 성공사례 같다). 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