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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자연을 거슬러』 토마스 에스페달 (열린책들, 2014) 자연을 거슬러 - 토마스 에스페달 지음, 손화수 옮김/열린책들 남자의 부엌에서는 언젠가는 싱싱했을 과실의 부패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탐스런 엉덩이처럼 생긴 복숭아는 거뭇한 반점이 생기며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다. 그의 조리대는 이미 시체공시소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먹지 못하게 된 복숭아를 종국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별수 없이 버려야 할밖에. 거실에서건 욕실에서건 남자는 이제 혼자다. 누군가의 저택 대문에 기대어 서서 섹스에 몰두했을 때, 풍만함을 지나 점차 두루뭉술해진 여자의 몸을 보았을 때,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내린 아이와 조우했을 때, 마침내 그녀가 죽었을 때, 그리고 복숭아가 썩어가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 남자는 천천히, 하지만 완벽하게 혼자가 된다. 젊음의 산물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더보기
『가족 사냥(전2권)』 덴도 아라타 (북스피어, 2012) 가족사냥 - 상 - 텐도 아라타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가족 사냥'에서 '가족'은 주어일까 목적어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을 것 같다. 어떤 공동체가 피로 얽혀있다는 건 무척 기기묘묘한 일이므로…….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이나 반대로 무책임한 태도 역시 가족의 일면이다. 새로운 가족 문제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일본의 2010년 『범죄 백서』를 보면 살인 사건의 50% 정도가 친족 살인이며 상해 치사 역시 친족이 관련된 경우가 50% 정도를 차지한다. 이쪽도 마찬가지다. 최근 이삼일가량 아침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아동학대는 물론이거니와 내 아들이 번 돈이니 며느리는 상관 말라며 마구 써버리는 시어머니, 밖에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지만 집에서는 폭군으로 변하는 남편 등 이상하리.. 더보기
『영원의 아이(전2권)』 덴도 아라타 (북스피어, 2010) 영원의 아이 - 상 - 덴도 아라타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어덜트 칠드런(일본에서 사용하는 한정된 의미가 아닌)의 이야기다. 그리고 「부모를 기쁘게 하고 싶다 (...) 의식 밑바닥에, 실은 '네가 열심히 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라는, 분풀이와도 비슷한 분노의 감정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 (...) 봐, 난 이렇게 하고 있어. 어때, 칭찬해, 인정하란 말이야」라는 료헤이의 상념이 이승환의 노랫말 ㅡ '어떡해야 내가 부모님의 맘에 들 수가 있을지'(「가족」) ㅡ 을 만나면 참 우스운 꼴로 변하기도 한다. 실은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숀이 윌에게 했던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It's not your fault.」 아이와 마찬가지로 부모 역시 빈약한 존재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그 '련(憐)'의.. 더보기
『오래오래』 에릭 오르세나 (열린책들, 2012) 오래오래 - 에릭 오르세나 지음, 이세욱 옮김/열린책들 야들야들하다고 말하겠다(설명할 길은 없고, 그저 '야들야들해 보이는' 첩어가 생각났는데 그게 '야들야들'이다) ㅡ 책을 덮은 후의 내 사고가 월러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청교도적 환상이었구나, 하는 결론으로 흘렀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가브리엘의 오랜 사랑인 빨간 후드 여인을 놓고 격투를 벌일 때 그의 주먹이 왜 상대의 눈과 코만을 향했는지 생각해보라. 아마도 소설의 어느 사건을 둘러봐도 이만큼 격정적인 장면은 없겠지만(섹스할 때? 흠, 그렇다면 이 책을 잘못 읽은 것이다) 거웃의 덤불숲 앞에서 후퇴하고 공격하고 논쟁하고 휴전하는 상설시장 같은 리듬이 어디에 또 있을지를. 원래부터가 나는 이런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오래전 결혼한 .. 더보기
『사랑은 혈투』 바스티앙 비베스 (미메시스, 2011) 사랑은 아름다워라……. 아이튠스에서 판매되는 노래 2,000~3,000곡 정도의 제목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고 하는군. 몸과 몸이 다투고 마음과 마음이 불붙는 ‘친밀함’에 의한 유대감, 이런 사랑에 대한 정신적 중독 작용이 우리의 감정적 호응에 얼마나 부합할 수 있을까.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 일주』에는 ‘사티’라는 풍습이 설명되어 있다. 과거 인도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남편이 죽으면 그 아내가 자발적으로 불타는 장작더미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것이란다 ㅡ 사랑이 소위 ‘헌신’과 동의어로서 판단될 수 있는 요소라 보여지기도 한다. 또한 인도 남부의 타밀족은 사랑의 포로가 된 사람들을 마야캄(mayakkam) ㅡ 현기증, 혼란, 도취, 망상 ㅡ 을 앓는다고 표현한다……. 이 『사랑은 혈투』는, 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