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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망량의 상자(전2권)』 교고쿠 나쓰히코 (손안의책, 2005)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는 코나투스(conatus)의 개념을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정의했다. 반면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어땠나. 그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를 이렇게 비판했다. 「자기 보존 명제는 틀렸다. 그 반대가 참이다. 바로 살아 있는 것들 전부가 가장 명료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것들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이상이 되기 위해서 행위한다.」 이것은 물론 니체의 ‘힘에의 의지’라는 명제로 뻗어나가는 개념이 되겠지만, 잠시 『망량의 상자』에서의 가나코와 요리코의 경우에 빗대어 볼까. 철로에 떨어진(혹은 떨어뜨린) 행위는 가나코와 요리코를 이어주는 끈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생한다는 소녀들의 생각에서 말이다. ‘그 이상이.. 더보기
『가다라의 돼지』 나카지마 라모 (북스피어, 2010) 여기 『가다라의 돼지』에서의 잃어버린 8년은 평범한 아이를 ‘바나나 키시투’로 변용케 했다(‘변용’이라니 굉장히 무심한 말이지만 어쨌거나 그렇다고 하자). ……시작은 거창해 보이는 말로 운을 떼었지만 돌이켜보면 참으로 많은 결점을 지닌 작품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풍부하고 우스꽝스러운’ 단점들을 품었음에도 나는 나카지마 라모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왜? 희한한 재미를 지니고 있으니까.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이 ‘이 세상에 이상한 일이란 없다’란 논의를 주장한다면 『가다라의 돼지』는 정반대에 서있다(등장인물인 미스터 미러클은 별개로 하자). 한마디로 소설은 주술(呪術)로 시작해서 주술로 끝난다. 그러고 보니 ‘주(呪)’, 한자에 입[口]이 들어가 있다. 쿠미나타투 마을의 주술사 오냐피데는 이렇게 말한다. 「.. 더보기
『네덜란드 살인 사건』 조르주 심농 (열린책들, 2011) 「화살처럼 살을 가로지르는 전기. 눈꺼풀에 어른거리는 찬연한 무지개. 두 귀에 감기는 거품 같은 음악. 그것은 오르가즘이어라.」 ㅡ 아나이스 닌(Anais Nin)의 말이다. 라이벌(rival)의 라틴어 어원을 보면 ‘다른 사람과 같은 강물을 사용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매력적인 파트너 한 명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들, 그것도 내일이 없는 기항지의 매력을 두루 경험한 일등 항해사였고 자그마한 요트도 한 척 가지고 있었던 ㅡ 여자에 탐닉하고 영어와 독일어에 능통하기도 한 ㅡ 콘라트 포핑아를 사이에 두고서(질투라는 것은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려 주는 지표의 성질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도 알려 줄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또 인문학적 연구에서 어느 정도 이끌어낸 결론.. 더보기
『누런 개』 조르주 심농 (열린책들, 2011) 내 속에서 매그레의 자리를 찾아주자. 홈즈, 뒤팽, 포와로, 말로, 뤼팽을 모두 제치고 당연하게(!) 엘러리 퀸을 엄지손가락 위에 올려놓았었지만, 지금은 엘러리 퀸과 쥘 매그레 2명의 인물이 왼쪽과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하나씩 올라가 있다. 조르주 심농(Georges Simenon)의 버즈북 『매그레 반장, 삶을 수사하다』(열린책들, 2011)의 제목에서처럼, 궁극의 주안점은 죄를 진 평범했던 자들의 삶을 뒤따라가는 행보에 있다는 것이 『누런 개』에서도 드러났고, 앞으로 ‘매그레 시리즈’가 쌓이면 쌓일수록 나는 이런 식의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쉬이 지나칠 수가 없음을 인정하는 바다. 일반적인 추리는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수준이기 마련이죠. 그런데 매그레는 범죄의 모순에서 출발해.. 더보기
『교차로의 밤』 조르주 심농 (열린책들, 2011) 티모르 섬에 살던 아오르족(Alor族)은 항상 불안과 초조감에 쌓여 있고, 의심이 많으며, 남을 믿지 않고,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으며, 항상 복수심에 불타 있다. 그래서 서로 자신들을 방어하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소모한다. 『교차로의 밤』에서의, 교차로를 중심으로 모여있는 세 집의 사람들이 그렇다. 물론 아로르족은 태생적으로 유형화된 경우이지만, 『교차로의 밤』은 문화적인 유형화로 맺어진 관계를 보여준다. 또 다른 것이라면 전자는 언뜻 보기에는 이런 사회가 어떻게 존속될 수 있는지 의심이 가지만, 후자를 보면 그런 낌새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고로 ‘교차로’란, 어디로든 나갈 수 있지만 어디로도 나갈 수 없는 그런 갈림길이다. 그럼 ‘밤’은…… 제임스 톰슨(James Thomson)이란 시인이 이렇게 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