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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전2권)』 알프레트 되블린 (시공사, 2010) 여기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최인훈의 「광장」이나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물론 세상은 주인공 프란츠 비버코프에게 술이 아니라 '나쁜 일'을 권하긴 하지만. 무척이나 단속적이며 다채로운(이미지가 확연히 드러나는) 서술과 치밀한 연출력으로 의식의 대공황이 말 그대로 '공황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할까 ㅡ 꼭 치아교정기를 낀 아이가 두서 없이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주인공은 '반듯한 모자'를 써도(1권 p.103) 머릿속은 늘 흔들리며 부유한다. 도살장의 동물 숫자 : 돼지 11,543마리. 소 2,016마리. 송아지 920마리. 양 14,450마리. 한 방, 휙, 그들은 뻗는다. 돼지, 소, 송아지들이 도살당한다. 거기 열중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어디 있는가? 우리는.. 더보기
『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열린책들, 2000) 콘트라베이스 연주의 그것처럼 포르테로 시작해서 피아노, 피아니시모, 그리고 메조포르테와 포르티시모를 넘나드는 정서의 변화가 강하게 느껴진다. 중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보았지만 딱히 감흥이랄 것도 느끼지 못하고서 책을 덮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ㅡ 책이 무척이나 얇은 것이, 당시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스물을 갓 넘겼을 때 신판을 구입해 읽고, 또 읽고, 아무 페이지나 열어 읽었다. 그래도 항상 『콘트라베이스』가 내게 주는 정서는, 그 강약이 다르더라도, 시종일관 스산하고 휑뎅그렁한 어떤 것이었다 ㅡ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나 심심풀이로 해보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p.96) 콘트라베이스를 낀 사내는 결을 내기도 하고 맥주를 마시기도 하며, 지극히, 무척이나, 궁극의 평범한 ㅡ 고.. 더보기
『궁극의 리스트』 움베르토 에코 (열린책들, 2010) 출판사의 샘플 교정지를 본 게 지난 8월이었다. 그 때만 해도 『궁극의 리스트』가 이렇게 '징그러운' 책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맙소사!). 200점에 가까운 삽화와, 역시나 징그러운 뱀과 같은 인용 텍스트(인용문을 읽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응당 완벽하게 읽을 수 없으리라 확신하지만, 극악무도한 발췌로 인해, 아직 오지 않은 두려움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저자가 밝힌, ㅡ 이 책은 '기타 등등'이라는 말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서문) ㅡ 시작부터 엄습하는 '궁극의 두려움.' ㅡ '기타 등등'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축복인 셈이다. 바흐의 「무한히 상승하는 카논」이나 에셔의 판화 작품들을 생각해 보라. 『궁극의 리스트』는 리스트, 즉 '목록의 의미'를 탐구한다. 목록의 의미란 건 어쩌면 .. 더보기
『동물농장』 조지 오웰 (펭귄클래식, 2008) 러시아의 스탈린은 언급하지 않아도, 그리고 그 상황과 들어맞고 있어도 『동물농장』은 자체로서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요소들을 충분히, 너무 많이 갖추고 있다 ㅡ 이야기는 진행되면서 계층이 나뉘고, 그 계층은 또 다른 단계로 구분되어진다. 혁명의 슬로건 아래 두 젊은 수퇘지 스노볼과 나폴레옹, 그리고 복서라는 말(바보스럽게 충성스런)로 표현되는 그들의 동물농장은 원초적인 불편함을 탐구하며 무서운 진실과 힘을 역설해준다 ㅡ 결말에서 돼지의 얼굴과 인간의 얼굴이 섞여지는 장면은 클라이맥스이자 새로운 동물농장의 출발이 된다. 또한 지극히 민주주의적인 다수결이지만 그것은 무지의 다수이며(왜 '평화의 댐'이 떠오를까), 죽음을 앞둔 돼지 메이저의 꿈에서 시작되는 혁명이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불쾌한 혁명이 되고 만.. 더보기
『어느 작가의 오후』 페터 한트케 (열린책들, 2010) 펜을 놓고 뒷짐을 지고 있을 때 비로소 창작을 한다. 그리고 사유한 것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텍스트화한다. 작가로서의 나와 나로서의 작가, 외부와 내부, 의자에 앉아 있는 것과 길을 걷는 것 사이의 공명에서 아름다운 ㅡ 치밀하고 고뇌적인 ㅡ 묘사로 풀어지는 또 한 번의 사유. 왜 사유와 텍스트가 동일한가. 왜 사유하는 것이 정제의 작업을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활자화되는가. 왜 무엇인가 눈目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흐름이라는 물줄기를 만나는가. 소설 속의 주인공 작가는 ㅡ 텍스트 바깥의 실제 작가는(어느 쪽을 실체라 할 수 있을까?) ㅡ 구경꾼이 되었다가 방랑자가 되고 다시 작가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작가는 여전히 이다. 그는 여전히 바깥과 안을 구분하지 못하고, 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