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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지상에서 영원으로(전3권)』 제임스 존스 (열린책들, 2008) 「재입대 블루스」 월요일에 제대비를 받았지,난 이제 더 이상 땅개가 아니야.군에서 너무 많이 돈을 주어 내 호주머니가 빵빵했지.쓸 돈이 아주 풍부했지,재입대 블루스. 화요일에 쇠푼을 들고 시내로 나갔어,더블베드가 놓인 방을 하나 잡았지.내일은 직장을 잡아야지 하지만 오늘 밤 너는 죽어 버릴지도 모르잖아.낭비할 시간이 없어,재입대 블루스. 수요일에는 바를 순례했지,내 친구들은 나를 왕좌에 올려놓았지.중국계 혼혈 여자 애를 하나 만났어,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고 하더군.내가 그년을 때렸나?재입대 블루스! 목요일에 잠을 깨보니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프더군.내 바지의 호주머니를 뒤져 보니,돈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없더군.그년이 내 머리를 홱 돌게 했어,재입대 블루스. 금요일에 바를 다시 찾아가서공짜 맥주를 한.. 더보기
『하자르 사전』 밀로라드 파비치 (열린책들, 2011) 흠,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곧이곧대로, 순서대로, 그렇게 읽어 내려갔다. 애초 한 번 읽어서는 텍스트의 혼란스러움에서 허우적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ㅡ 세상에는 슬쩍 한 번 눈길을 줬는데도 무궁무진한 흥미로움을 느끼게 하지만 두 번 다시 읽을 수 없는 책과, 쥐며느리가 곱송그린 몸을 펴듯 느릿하게 읽히지만 몇 번이고 다시 눈을 대고 싶은 책이 있는데 『하자르 사전』은 양쪽에 끼인 샌드위치의 꼴로 보인다. 각설하고, 하자르 민족을 이주시킨 것은 동쪽의 수컷 바람이라 해도 그들(의 역사)을 촘촘히 활자로 엮은 것은 어디 바람뿐이겠는가. 사실 ‘하자르의 얼굴’처럼 이쪽의 텍스트가 저쪽의 텍스트로 변모하는 양상을 곳곳에서 ㅡ 자의든 타의든 ㅡ 엿보게 된다. 아마도 내가 이 『하자르 사전』을 읽은 날 밤이 유.. 더보기
『W 또는 유년의 기억』 조르주 페렉 (펭귄클래식, 2011) ①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는 「음경이 발기했을 때 길이가 적어도 30센티미터는 되는 사람들이 자기 얘기를 쓰는 한, 나는 자서전에 대해서는 어떤 반감도 갖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럼 조르주 페렉은? ②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차례차례 하나씩 끄집어내는 페렉의 서술에, 우리는 거기에 조금은 낯설게 빠져든다. 그러므로 얼마간은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③ W에는 승패는 필요 없고 운이라는 요행이 난무하지만 실은 그것보다 곪아터진 상처만이 더쳐갈 뿐이다. ④ 유년의 기억이 과연 W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⑤ 작가가 처음 연재할 때 ‘꿈’이 가득한 소설이라고는 했지만 대체 W에 꿈이 어디 있단 말인가? ⑥ 볼라뇨의 말대로 페렉이 30센티미터의 발기된 음경을 소유했건 그렇지 않.. 더보기
『투쟁 영역의 확장』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3) 흡연실을 나와 전철을 타기 위해 나는 정기권을 찍고 오십 미터쯤을 걸어가 선로 앞에 선다. 츄오센은 급행이 많아 집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칸다, 오차노미즈, 요쓰야만 거치면 바로 신주쿠다. 노란선 안쪽으로 펑퍼짐한 카고 바지를 입은 남자가 서있다. 나는 설마, 하며 그의 바지 속에 구겨 넣은 오른손을 주목한다. 그 속에는 아마도 권총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몇 발이 장전돼있는지 꼼지락거리며 세고 있는 중이다. 잠시 후 벨이 울리고 전철이 들어와 서면, 한 발짝 앞으로 나가 「젠장! 이렇게도 무료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소리치면서 자신의 입 속에 조그만 탄환 하나를 박아 넣을 것이다. 무심코 돌아본 자동판매기에 드링크를 손에 쥔 남자가 싱글싱글 웃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건 리포비탄D.. 더보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펭귄클래식, 2009)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매력은 다양한 해석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ㅡ 거의 절망에 가까운 상태였으므로. 우리는 때때로 20세기를 후기 니체 시대라 부르기도 하지만, 니체를 둘러싼 니힐리즘과 위버멘쉬로 위시되는 철학과 이론은 광시곡의 그것과 같았고, 심연의 장막 밖에서 비트적거리는 무분별한 말들이었다. 날카로운 파토스 위에서 위태위태하며 분출되는 메타포들은 사유의 침식과 퇴적을 거쳐 다시 융기를 향해 떠오르는 기암괴석이나 다름없다(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차라투스트라가 지극한 행복의 섬에서 사라지자 군중은 그가 악마에게 잡혀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 중 어떤 이는 ‘오히려 차라투스트라가 악마를 잡아갔을걸’이라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