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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문』 나쓰메 소세키 (비채, 2012) 의지하려 잡은 승강구 쇠파이프가 깜짝 놀랄 만큼 차가웠다는 건,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였을까. 느리게 공간을 이동하고 느리게 시간을 훑는 제대권락(臍帶卷絡)의 앵글. 죽은 아이가 아니라 소스케 자신이 불안의 탯줄에 휘감겨 있다. 제로섬 게임. 그러나 즉시 혼합되고 잊어버리게 되는 카드놀음. 미음은 고유한 세계 안에 있다. 그것은 약동하는 생명처럼 소유자와 더불어 하나의 체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그 마음의 소유자가 의식적으로 지각하고 있는 것은 순수하게 그 마음에 들어앉지 않는다. 감각과 의식은 항상 재구성되므로. 함몰된 마음의 문(門)이다. 무엇인가를 의식할 때는 익숙하게 여기던 친숙함이 문제를 일으킬 때다. 소스케는 불안과 불안정, 불유쾌함과 부재(不在)의 와류 속에서 바동거리고 있다. 「가는 자는 가지.. 더보기
『D의 복합』 마쓰모토 세이초 (모비딕, 2012) 괜히 장르문학이라고 편을 갈라 사람 위에 책 있고 사람 아래 책 있는 것처럼 말하면, 나는 싫다. 짐짓 도저하게 ‘장르’문학이라는 딱지는 붙여놓았지만 ‘순’문학과 비교하며 순간의 오락거리로 치부해버리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심농(Georges Simenon)은 ‘선전 속 인간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는데 세이초 자신도 ‘환상이 아닌 리얼리즘 안에서’ 미스터리를 쓰고 싶다고 했다(실제로 둘은 동시대를 살았다). 복잡다단한 트릭이나 특수한 환경이 아니라 어디서나 일어날 것 같은, 그것. 세이초 작품은 그래서 ‘여흥’이 아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은 언제나 뻑적지근하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그런가. 이런저런 말을 붙여도 역시 초반은 힘이 조금 든다. 얼마 읽지도 않았는데, 뭐야 이건 .. 더보기
『나사의 회전』 헨리 제임스 (열린책들, 2011) 스티븐 킹은 자신의 책(『죽음의 무도』)에서 셜리 잭슨의 『힐 하우스의 유령』과 함께 지난 100년간 등장한 초자연적 소설들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바로 이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꼽는다 ㅡ 동시에 유령의 원형에 관해서라면 친절한 꼬마 유령 캐스퍼를 논의하는 게 더 낫다는 발랄한(!) 단서를 달아두고서. 시골 대저택에 온 가정교사가 유령을 목격하면서 벌어지는 심리공포 소설 『나사의 회전』은 다분히 중의적인 동시에 다의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된다. 어린애들의 마음이 구부러져 있거나 가정교사의 시력이 좋지 않거나 하다는 건데(제발 두 가지의 경우밖에 없었으면 좋으련만), 이 고상한 문장으로 하여금 공포가 공포로서 온전히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비밀은 비밀로 남겨두는 어정쩡한 미.. 더보기
『느림』 밀란 쿤데라 (민음사, 2012, 2판) 곤란하다, 상당히. 젠장. 대관절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나는 절망한다. ‘이 느림을 느리게’ 읽지 않으면 얼간이가 되겠는 걸, 하면서 말이지. 책이 명쾌하지 않으니 나도 명쾌하게 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건, 음, 이건 ‘성이 호텔로’ 변신한 이야기로구나, 하는 것. 하나의 연극이 펼쳐지는 마룻바닥 위구나. 그리고 사랑 또한 변해버린 이야기. 아니, 사랑과 인간은 그대론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내게 묻는 자가 없을 때는 아는 것 같다가도 막상 묻는 자가 있어서 그에게 설명하려 하면 나는 알 수가 없다.」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인 게지. 시간이란 놈은 좀처럼 알 수 없는 것이므로 T 부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느림과 한가로움 역시 나로서는 잘 입증이 되질 않는다. 느리게 행동하는 .. 더보기
『소설』 제임스 미치너 (열린책들, 2006) 올해(2011) 읽은 어느 기사에는 두 소설을 비교하여 전개시킨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런 식이었다. ‘폴 오스터가 쓴 『뉴욕 3부작』은 한 인물에게서 여러 인물이 겹치는 과정에서 자기를 찾는 구도가 보인다면, 제임스 미치너(『소설』)는 작가 자신을 네 명의 등장인물로 나눈 셈이다.’ 공공 도서관 사서가 어린 셜리 ㅡ 이본 마멜 ㅡ 에게 해준 말은 더욱 농밀하다. 「(…) 그게 바로 소설이란다. 서로의 꿈을 교환하는 것…….」 이 작품은 나에게 부적과도 같은 것인데 연유는 이러하다. 일본에 있을 때 카미야(神谷)라는 오십 줄의 양반과 경마장엘 간 적이 있다. 그가 내게 말했다. 「태어나서 처음 산 빗나간 마권을 지갑에 가지고 있으면 교통사고를 막아주는 부적이 되는 거야.」 그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지금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