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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푸른숲, 2007, 3판) 허삼관 매혈기 -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푸른숲 건강의 징표였던 매혈(賣血)이 생계수단으로 변하고 '자라 대가리' 노릇을 한 허삼관은 아Q의 정신승리를 물려받아 제 피를 쭉쭉 뽑아낸다. 공장에서 일해 번 돈은 땀으로 번 것이고 매혈로 번 돈은 피를 흘려 번 돈이므로 함부로 쓸 수는 없는 일이다, 라는 것이 그의 철칙 아닌 철칙. 그러면서 돼지간볶음 한 접시와 따뜻하게 데운 황주 두 냥이면 되었건만, 불행하게도 피를 팔다 쓰러져 도리어 수혈을 받는 처지에 몰리는가하면 이제는 나이가 들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 늙은이의 피만 남았으니, 이를 피로 흥한 자 피로 망한다 한들 누가 말을 보탤 수 있을까. 결혼하기 위해 피를 팔고, 외도의 대가인 선물을 사기 위해 피를 팔고, 아들놈이 저지른 폭행을 수습하기 .. 더보기
『인터넷 빨간책』 백욱인 (휴머니스트, 2015) 인터넷 빨간책 - 백욱인 지음/휴머니스트 저자 백욱인이 한국어로 옮겼던 니콜라스 네그로폰테의 『디지털이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하루에 최소한 3시간 정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해왔지만 아직도 가끔씩 컴퓨터에 대하여 좌절감을 느낀다. 컴퓨터를 이해하기란 은행 청구서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이 책이 나온 것은 20년 전이고, 이제 우리는 컴퓨터와 더불어 스마트폰을 통해 손가락을 적당한 각도로 옴직거리는 것만으로도 월드와이드웹의 거미줄 속을 제멋대로 돌아다닌다. 어디 돌아다니기만 할까. 언젠간 호수만 바라보던 나르키소스마냥 무언가에 홀려 거기에 빠져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나 또한 스마트폰을 소유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하루 몇 시간 동안이나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 더보기
『브릴리언스』 마커스 세이키 (황금가지, 2015) 브릴리언스 - 마커스 세이키 지음, 정대단 옮김/황금가지 로버트 소여에 의하면 SF란 '현재에는 없을지라도 인간의 인식이 닿을 수 있는 부분'을 다루는데 『브릴리언스』가 이 정의에 얼마나 들어맞을는지는 모르겠다. 근미래, 사이버펑크, 하드SF, 소프트SF 등의 말을 갖다 붙여도 얼추 비슷한 내용을 품고 있으면서, 또 결정적으로 여기에 뮤턴트(돌연변이)가 등장하는 이야기여서ㅡ 영화 《엑스맨》처럼 분류되어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거나 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장애로 바라보기도 하는 서번트 증후군에서 출발한 이 소설은 특수한 능력을 가진 '브릴리언트'들에 의해 꾸려진다. 이들은 하나가 흥하면 하나가 망하는ㅡ 이를테면 천재와 장애라는 플러스마이너스의 개념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과 똑같으면서도 저마다 초인(超人)과 같.. 더보기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민음사, 2014)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민음사 깨닫다, 이해하다, 터득하다, 라는 의미의 일본어 사토루(悟る)를 가져다 쓴 '사토리(さとり)세대'라는 말이 이곳저곳에서 심심찮게 들려온다. 돈이나 사치뿐 아니라 출세에도 관심이 없는 일본 청년들을 일컫는 말로, 극도의 현실주의적 양상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한국도 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三抛)세대, 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인 88만원세대, 이십태 태반이 백수라는 의미의 이태백 그리고 이것이 변형된 이퇴백까지ㅡ 직장생활을 하는 이십대라 해도 언제 퇴직해 백수가 될지 모른다는 뜻이란다. 1930년대 일본의 어느 신문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사회운동이 왕성하게 전개되던 시기에는 대.. 더보기
『웰컴, 삼바』 델핀 쿨랭 (열린책들, 2015) 웰컴, 삼바 - 델핀 쿨랭 지음, 이상해 옮김/열린책들 시효가 만료된 임시 허가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신이 당신인 것을 증명할 수도 없고, 반대로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줄 수도 없으며, 그저 공무원 옆구리의 서류철 바깥에서 맴돌 뿐이다. 갈가리 찢긴 접수증도 마찬가지. 왜? 그쪽 역시 유효기간이 끝나버렸으므로. 종이에 찍힌 숫자놀음, 그리고 급여 명세서와 각종 청구서, 은행계좌 출금 명세서와 같은 '생활의 증거들' 없이는, 당신은 당신이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조차 소리 내어 말할 수 없게 된다. 「이민국 국장은 널 믿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체류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야.」 삼바가 그의 삼촌으로부터 체류증을 '물려받는' 것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신분증이 없다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