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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엿보는 고헤이지』 교고쿠 나쓰히코 (북스피어, 2013) 엿보는 고헤이지 -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작가가 의도한 바는 '고헤이지 이야기'의 원형 그대로는 아닐 테고 ㅡ 고헤이지에게 있어 존재의 증명이란 발꿈치를 만지는 것일 텐데, 본인은 제 몸을 만질 수 있을는지 몰라도 타인은 그를 만질 수 없다. 고헤이지가 스스로를 이 세계에서 열외로 취급 받게끔 의도한 것인지 타의로 그런 선택을 하게 됐는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고, 헛방을 표류지(주거지)로 삼은 이유도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는다. 사회의 구성원이자 가정의 구성원에 몸담지 않고 헛방의 문을 살짝 열어 두어 길쭉한 틈으로 밖을 내다보는 건 아베 고보가 만든 '상자인간' 같은 느낌이다. 상자인간 역시 상자에 뚫어 놓은 엿보기용 창문으로 세상을 내다보기만 할뿐 좀처럼 세상 속으로 뛰어들지.. 더보기
『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현대문학, 2013) 레베카 -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현대문학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듯하나 화자라고 할 만한 이의 이름이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면 두 소설 모두 그녀들의 입과 생각, 시선만을 차용해 끈덕지게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반대로 양쪽 모두 다소간 열린 결말이라는 점에서는 일치를 보이고 있지만, 헨리 제임스는 유령인지 뭔지의 존재를 확정짓지 않아서 해석의 여지가 조금 더 많은 반면 『레베카』는 살아있었던 인물을 등장시키고 상대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길을 보다 좁혀 놓았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소설을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비밀을 알려 주겠다고 약속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완전치 않을 정도로만. 스티븐 킹에 의하면 모든 공포 이야기들은 두 가지 집단으로 나눌.. 더보기
『구원』 자크 스트라우스 (민음사, 2013) 구원 - 자크 스트라우스 지음, 서창렬 옮김/민음사 열한 살짜리 애새끼가 대체 뭘 알 수 있겠나. 그래도 일단 내 쪽에서 접어줘야 할 것은 잭이 그 나이에 샴푸 병으로 자위를 했다는 건데, 이것만 봐도 나보다는 행동 발달이 좋긴 하다 ― 나이도 나이지만 대체 샴푸 병을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알고 싶긴 한데). 행동 발달이 좋다는 건, 지(智)와 덕(德)까지 겸비할 수 있다는 건데, 나로 말하자면 지덕체에서 체(體)가 맨 앞으로 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야말로 잭을 지지할 수 있는 요건은 갖춘 셈이다. 이것은 자신의 신체를 돌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기쁨도 슬픔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으로, 예컨대 조콘다의 눈썹 같은 거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없다면 왜 없는.. 더보기
『어릿광대의 나비』 엔조 도 (민음사, 2012) 어릿광대의 나비 - 엔조 도 지음, 김수현 옮김/민음사 부정의 부정은 긍정_화부가 야로를 등한시하는 직무유기를 범해도 결국 탈 것은 타고 만다_뭐 이런 이야기쯤이 되겠다. 그러니 별 다섯 개가 만점이라면 다섯 개를 주고 백 개가 만점이라면 백 개를 주자_아니면 하나도 주지 말든가. 어쨌든 어릿광대 같은 나비 같은 작가 같은 사람이 글을 썼고 읽는 것은 어릿광대 같은 나비 같은 독자 같은 나 같은 사람일 테니. 어디가 현대 언어 표현의 최전선이고 뭐가 미래의 소설인지도 모르겠는 것이 A. A. 에이브럼스라는 말더듬이같이 발음해야만 하는 작자를 내세워 전혀 예측이 안 되는 텍스트를 만들어냈다 해도, 나 같은 사람은 궁금해서라도 읽지 않겠느냔 말이다. 더보기
『밀어』 김경주 (문학동네, 2012) 밀어 - 김경주 지음, 전소연 사진/문학동네 불알, 이 쪼글쪼글해졌다가 팽팽해졌다가를 흡사 내 생애를 통틀어 숨겨온 습속(習俗)의 흔들림으로 하여금 의지를 돋우듯 왼쪽으로 쏠린 것을 느끼고 있다. 쓸쓸한 냄새가 아랫도리 깊숙한 곳에서 저만치 멀어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얼굴을 그린다. ……쓸개 빠진 놈을 본 일이 있는지. 노악취미라고 해야 할는지 취미고 뭐고 할 것 없이 태생적으로 무미건조함을 타고났기 때문에야말로 그런 자라고 불러야 할는지는 이 남겨진 글로써 얼마간은 해소가 되리라고 보지만 말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무표정한 인간의 표본이랄까 무의지의 대변인이랄까 하는 말로도 쉬 설명이 될 것 같으니까. 무감동하게 계절은 바뀌어서 겨울 초입인데도 한겨울인 것처럼 발가락 끝이 시리다. 나는 동상(凍..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