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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헨리 제임스 (열린책들, 2011) 스티븐 킹은 자신의 책(『죽음의 무도』)에서 셜리 잭슨의 『힐 하우스의 유령』과 함께 지난 100년간 등장한 초자연적 소설들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바로 이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꼽는다 ㅡ 동시에 유령의 원형에 관해서라면 친절한 꼬마 유령 캐스퍼를 논의하는 게 더 낫다는 발랄한(!) 단서를 달아두고서. 시골 대저택에 온 가정교사가 유령을 목격하면서 벌어지는 심리공포 소설 『나사의 회전』은 다분히 중의적인 동시에 다의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된다. 어린애들의 마음이 구부러져 있거나 가정교사의 시력이 좋지 않거나 하다는 건데(제발 두 가지의 경우밖에 없었으면 좋으련만), 이 고상한 문장으로 하여금 공포가 공포로서 온전히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비밀은 비밀로 남겨두는 어정쩡한 미.. 더보기
『느림』 밀란 쿤데라 (민음사, 2012, 2판) 곤란하다, 상당히. 젠장. 대관절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나는 절망한다. ‘이 느림을 느리게’ 읽지 않으면 얼간이가 되겠는 걸, 하면서 말이지. 책이 명쾌하지 않으니 나도 명쾌하게 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건, 음, 이건 ‘성이 호텔로’ 변신한 이야기로구나, 하는 것. 하나의 연극이 펼쳐지는 마룻바닥 위구나. 그리고 사랑 또한 변해버린 이야기. 아니, 사랑과 인간은 그대론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내게 묻는 자가 없을 때는 아는 것 같다가도 막상 묻는 자가 있어서 그에게 설명하려 하면 나는 알 수가 없다.」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인 게지. 시간이란 놈은 좀처럼 알 수 없는 것이므로 T 부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느림과 한가로움 역시 나로서는 잘 입증이 되질 않는다. 느리게 행동하는 .. 더보기
『소설』 제임스 미치너 (열린책들, 2006) 올해(2011) 읽은 어느 기사에는 두 소설을 비교하여 전개시킨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런 식이었다. ‘폴 오스터가 쓴 『뉴욕 3부작』은 한 인물에게서 여러 인물이 겹치는 과정에서 자기를 찾는 구도가 보인다면, 제임스 미치너(『소설』)는 작가 자신을 네 명의 등장인물로 나눈 셈이다.’ 공공 도서관 사서가 어린 셜리 ㅡ 이본 마멜 ㅡ 에게 해준 말은 더욱 농밀하다. 「(…) 그게 바로 소설이란다. 서로의 꿈을 교환하는 것…….」 이 작품은 나에게 부적과도 같은 것인데 연유는 이러하다. 일본에 있을 때 카미야(神谷)라는 오십 줄의 양반과 경마장엘 간 적이 있다. 그가 내게 말했다. 「태어나서 처음 산 빗나간 마권을 지갑에 가지고 있으면 교통사고를 막아주는 부적이 되는 거야.」 그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지금까.. 더보기
『지상에서 영원으로(전3권)』 제임스 존스 (열린책들, 2008) 「재입대 블루스」 월요일에 제대비를 받았지,난 이제 더 이상 땅개가 아니야.군에서 너무 많이 돈을 주어 내 호주머니가 빵빵했지.쓸 돈이 아주 풍부했지,재입대 블루스. 화요일에 쇠푼을 들고 시내로 나갔어,더블베드가 놓인 방을 하나 잡았지.내일은 직장을 잡아야지 하지만 오늘 밤 너는 죽어 버릴지도 모르잖아.낭비할 시간이 없어,재입대 블루스. 수요일에는 바를 순례했지,내 친구들은 나를 왕좌에 올려놓았지.중국계 혼혈 여자 애를 하나 만났어,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고 하더군.내가 그년을 때렸나?재입대 블루스! 목요일에 잠을 깨보니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프더군.내 바지의 호주머니를 뒤져 보니,돈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없더군.그년이 내 머리를 홱 돌게 했어,재입대 블루스. 금요일에 바를 다시 찾아가서공짜 맥주를 한.. 더보기
『하자르 사전』 밀로라드 파비치 (열린책들, 2011) 흠,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곧이곧대로, 순서대로, 그렇게 읽어 내려갔다. 애초 한 번 읽어서는 텍스트의 혼란스러움에서 허우적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ㅡ 세상에는 슬쩍 한 번 눈길을 줬는데도 무궁무진한 흥미로움을 느끼게 하지만 두 번 다시 읽을 수 없는 책과, 쥐며느리가 곱송그린 몸을 펴듯 느릿하게 읽히지만 몇 번이고 다시 눈을 대고 싶은 책이 있는데 『하자르 사전』은 양쪽에 끼인 샌드위치의 꼴로 보인다. 각설하고, 하자르 민족을 이주시킨 것은 동쪽의 수컷 바람이라 해도 그들(의 역사)을 촘촘히 활자로 엮은 것은 어디 바람뿐이겠는가. 사실 ‘하자르의 얼굴’처럼 이쪽의 텍스트가 저쪽의 텍스트로 변모하는 양상을 곳곳에서 ㅡ 자의든 타의든 ㅡ 엿보게 된다. 아마도 내가 이 『하자르 사전』을 읽은 날 밤이 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