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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또는 유년의 기억』 조르주 페렉 (펭귄클래식, 2011) ①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는 「음경이 발기했을 때 길이가 적어도 30센티미터는 되는 사람들이 자기 얘기를 쓰는 한, 나는 자서전에 대해서는 어떤 반감도 갖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럼 조르주 페렉은? ②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차례차례 하나씩 끄집어내는 페렉의 서술에, 우리는 거기에 조금은 낯설게 빠져든다. 그러므로 얼마간은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③ W에는 승패는 필요 없고 운이라는 요행이 난무하지만 실은 그것보다 곪아터진 상처만이 더쳐갈 뿐이다. ④ 유년의 기억이 과연 W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⑤ 작가가 처음 연재할 때 ‘꿈’이 가득한 소설이라고는 했지만 대체 W에 꿈이 어디 있단 말인가? ⑥ 볼라뇨의 말대로 페렉이 30센티미터의 발기된 음경을 소유했건 그렇지 않.. 더보기
『아홀로틀 로드킬』 헬레네 헤게만 (열린책들, 2010) 누군가의 서평처럼 ‘확실히 완전히 개운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Ctrl+C와 Ctrl+V만으로는 세상만사가 탈 없이 흘러가지 않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이기주의적이고 무신경한’ 열일곱의 작가는 본문에서 이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혹은 그렇지만, 이 문제는 여기서 가차없이 빼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왜 이다지도 극찬을 받고, 미프티는 (맙소사!) 세상의 모든 원죄를 혼자서 짊어진 얼간이가 되었는가에 대한 감흥은 책 겉표지의 새빨간 아홀로틀로 대신하자. 나는 죽었다 깨도 미프티처럼은 될 수 없다. 심하게 탈골된 언어를 구사하며 마치 카타콤에 갇힌 로마 병사처럼 기는 그녀의 삶은, 당최 이해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미프티는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더보기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토마스 만 (열린책들, 2009) 토마스 만이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제1부를 쓰고(미완성) 취리히에 있는 병원에서 죽어갈 때 부인에게 「내 안경을 주시오.」라고 말한 뒤 숨을 거두었다는데, 팬으로부터 암살당한 비틀즈 존 레논의 마지막 말인 「내가 총에 맞았어!」와 비교하면 생을 마감할 때조차 자기와 독일을 동일시한 건지 안경과 동일시한 건지 아니면 어느 지면에 발표된 것처럼 '썩 좋은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인지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래도 최소한 '언제나 자기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보편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한 토마스 만의 중단편집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그의 분신들이라 해도 될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동일한 결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고자 했던 예술 · 생.. 더보기
『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한겨레출판, 2011) 조지 오웰은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인 태도라며 한결같이 인간이 만든 것들에 대한 경이로운 성찰을 보여준다. 그는 그의 숨은 걸작 『숨 쉬러 나가다』에서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한다. 「숨 쉬러 나가다니! 숨 쉴 공기가 없는데.」라고(p.311). 실제로 오웰은 장신에다가 마른 체형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뚱보 조지 볼링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라 불리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보험영업사원인 조지 볼링은 우연히 생긴 17파운드를 가지고 아내 모르게 시가를 사는 동시에 20년 전 떠나온 고향으로의 일탈(말이 조금 이상하지만)을 감행한다. 여섯 살 때 아무것도 모르고 낚았던 물고기, 청소년기에 읽었던 1페니짜리 소년 주간지와 소설들, 전쟁 통에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20년.. 더보기
『책의 우주』 움베르토 에코, 장클로드 카리에르 (열린책들, 2011) 움베르토 에코와 장클로드 카리에르의 대담집. '책은 죽지 않는다' 라는 권두 대담으로 시작하긴 하지만 그들 스스로도 인간 수명의 불로장생을 의심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에서인지 책의 마지막은 '죽고 나서 자신의 서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끝난다. 인터넷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기억이 우리 수중에 들어오게 된 이 상황에서, 각 문화는 무엇을 간직해야 하며 무엇을 잊어버려야 할지 우리에게 말해 줌으로써 여과 작용을 한다고는 하지만, 과연 책 또한 그러한가? 책은 단지 하나의 용기(容器)일 뿐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관찰하고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어쩌면 모든 것을 결정할 수도 있는 '위대한 시각'이었습니다.ㅡ 카리에르 지금의 책은 과연 천대를 받고 있는가. 예스라는 대답이라면 왜.. 더보기